2학기가 되자 나는 시야 가장자리로는 성에 차지 않아 점심시간에 이치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. 옴니버스 형식의 만화 <모태왕자>는 건강하고 민첩해 보이는 왕자가 때때로 성을 빠져나와 신분을 감춘 채 마을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, 주변을 탐문하거나 탐정처럼 조사를 하여 모든 악의 근원을 찾아낸 뒤, 왕자의 권한을 휘둘러 이를 응징하는 이야기였다.
그래, 다음번 <모태왕자>는 왕자가 마법에 걸려 와인 코르크 마개로 변해 버리는 이야기를 그리자. 옴짝달싹 못 하고 병 주둥이에 꽉 낀 채, 어두운 저장고에 갇히는 왕자는 틀림없이 섹시할 거였다.
자기 입으로 자기 자랑을 한 주제에 겸손을 떠는 니.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 앞에서 멋진 솜씨로 마술을 부린 느낌이었다. 자, 그럼 사라진 내 동전은 어디로 간거지?
지적하는 것도 모자라 충고까지 하는 니.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눈앞의 실크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장면이 펼쳐진 느낌이었다. 자, 그럼 이 비둘기는 내가 키워야 하는 거야?
나와 같은 타입인 그의 행동은 나에게 전혀 의외의 일이 아니다. 니도 나처럼 아집이 심해서 누군가에게 꽂히면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타입이었다. 자기 맘대로 이 사람이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단정짓는, 스토커 바로 전 단계의 자아도취가 심한 타입, 그걸 알기 때문에 오히려 매몰차게 굴 수 없었다.
창문에서 두꺼운 와이어가 스르륵 내려와서 보면 청소 회사 사람으로,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8층 우리 사무실에서 오로지 와이어 두 줄에 매달려 창문을 닦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떼지 못했다.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고맙다는 의미를 담아 살짝 고개를 숙였지만, 지금은 선배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완전 무시. 마찬가지로 오후 네 시가 되면 매일 쓰레기통을 비우러 오는 청소 회사 아줌마도 무시. 나만 고맙습니다, 라고 말하는게 부끄러워서 어느새 하지 않게 되었다.
이치 진짜로 너무


김탁구임 ㅋㅋㅋㅋ
열성팬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있는 이치가 기적처럼 보였다. 니는 무시했던 화제에 이렇게 즐겁게 호응해 주다니, 그것도 새벽 네 시에. 우리는 마음이 통하는게 틀림없어. 사귀면 이야기할 게 분명히 많이 있을거야. 하지만 이 허무함은 뭘까. 서로 통하긴 하지만, 이치가 나를 좋아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이 전해져 오기 때문일까.
마음이 통해? 그게 무슨 소용이야. 거기서 아무 케미도 생겨나지 않는데.
"그렇구나." 이치가 조용히 웃었다. "어쨌든 가리비의 외투막이라니, 넌 말을 참 재치 있게 하는 것 같아."
"어째서 나를 '너'라고 부르는 거야?"
내가 묻자 이치가 내가 너무 좋아하는, 부끄러워하는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.
"미안,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."
에토 씨에 대해 말해 줘, 라고 하던 니의 얼굴이 떠올랐다. 에토 씨에 대해 말해 줘. 가슴에 빨간 포스트잇을 달고 있었을 뿐인데도 나를 발견해 준 사람.
너무 좋아서 우럿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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